청주시의 역사적 장소

 

것대산 봉수대

Beacon System in Geosdaesan Mountain, Cheongju

 

문화재자료_26호_청주_것대산봉수_부분컷1.jpg

 

청주시 동쪽, 우암산 너머에 있는 해발 493m의 높이의

산에 있는 활석을 이용한 석축+토양을 섞은 원형 봉수대입니다.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산107-2번지

구글 어스(Google Earth) : 지구본을 통한 입체영상보기

 

Geosdaesan (493m/1 617ft a.s.l.)

https://peakvisor.com/peak/geosdaesan.html

소숫점 좌표 : 36.645233 N  127.537871 E

 

문화재자료_26호_청주_것대산봉수_부분컷.jpg

 

충청북도의 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98.11.20.) (1)

 

현재까지 위치가 확인된 봉수는 전국 400여 개소에 이르지만

대부분의 봉수대는 봉수제가 폐지된 후, 사용되지 않아 

110년이 넘게 방치된 것들로 잔존상태가 불량한 편입니다.(17)

 

(3) 전국의 산이 4,440개 정도 되니 7개 산 정상을 오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봉수대이지만 원형이 보존된 봉수대는 거의 없는데요.

남산봉수, 주전봉수, 천림산봉수 등 몇 개 안 되는 봉수 중 하나가

것대산 봉수 같아요.

 

봉수대는 원래 군사시설로 삼국 시대부터 있었는데요.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일시적인 운영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군사적인 목적에서 설치된 봉수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12, 13세기)라고 합니다.(2)

 

이러했던 봉수가 제대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세종에 이르러 체계적인 형태를 지니게 되는데요.

세종은 전국의 봉수 노선을 1로(路)에서 5로(路)로 나누고,

봉수를 전달하는 봉수대는 전국적으로 약 643개에 달한다고

<증보문헌비고>는 기록하고 있습니다.(14)

조선의 봉수는 국경의 변방에서부터 내륙을 거쳐 서울 남산에

이르는 중앙집중식이었으나 때로는 중앙에서 국경지방으로 보내는 

분산식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조선 시대 봉수대 5대 직봉 기간선로의 구성입니다.

 

제1로, 함경도 경흥 > 강원도 경기도 양주 아차산 봉수, 

제2로, 동래 다대포 > 경상도 > 충청도 > 경기도 > 성남 천림산 봉수, 

제3로, 평안도 강계 > 황해도 > 경기도 > 서울 무악 동봉수, 

제4로, 평안도 의주 > 황해도 > 경기도 > 서울 무악 서봉수, 

제5로, 전남 순천 > 충청도 > 경기도 > 서울 개화산 봉수

 

제1로, 3로, 4로는 몽고, 여진, 중국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제2로, 5로는 왜족의 침입을 대비한 루트(Root)였다고 해요.

 

이렇게 나눠진 봉수는 최종적으로 한양(지금의 서울)의 

목멱산 봉수대, 경봉수(지금의 남산봉수)로 집결하였다고 합니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였던 중앙봉수입니다.

것대산 봉수대는 그 기능과 역활이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내륙의 봉수로서 내지봉수(복리봉화)이면서 간봉입니다.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내지봉수(內地烽燧)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간봉(間烽)

 

문화재자료_26호_청주_것대산봉수_측면.jpg

 

것대산 봉수대, 봉수대가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수제도가 마련된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유사시 봉수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는데요.

변방의 긴급한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리는 중요한 군사통신제도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봉수대는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데요. 1510년(중종 5년) 삼포왜란 때는 불을 올리지

않았고, 1513년(중종 8년) 인천, 충청과 전라지역에 왜적이 

침입하여 20여 일간 체류했어도 봉화를 올리지 않았다고 해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는 왜군들이 봉수를 

파괴하면서 조선의 봉수는 임진왜란 이후 기능이 마비되었고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터졌으나 한 달이 넘도록 봉화를 

띄우지 않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봉수무용론과 봉수의 폐단을 주장하는 일이 

점차 늘어났으며 임란이 끝난 이후, 일시 폐지와 복구를 반복하며 

유지하였으나 이를 보완하고 대체하고자 1597년(선조 30년)에 

파발제가 도입되어 봉수제와 같이 운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중지됩니다.

서구화, 근대화 개혁으로 현대적인 전화 체제로 변경되었으며

이듬해에 군부의 주청으로 1895년(고종 32년) 각지의 봉대와 

봉수군이 폐지됨에 따라 봉수 역시 그 기능을 멈추게 됩니다.

 

경남 남해의 금산 봉수에서 출발하여 서울 남산에 이르는 중간 

길목에 자리잡은 이 봉수대는, 남쪽으로는 문의 소이산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으로 진천 소을산 봉수에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거차대 봉수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이후의 지리서에는 

거질대산봉수라고 적혀있다. 동서로 긴 타원 모양으로, 

둘레에 보호벽을 둘렀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무덤 1기가 봉수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성의 주변을 살펴 사태를 알리는 

통신시설인 봉돈은 현재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6)

 

이렇게 되었던 것대산 봉수대를 청주시가 2008년 복원 사업을 

추진하였고 2009년 복원을 완료합니다.(7)

 

문화재자료_26호_청주_것대산봉수_부분컷4.jpg

 

것대산 봉수지 기행문 보기

https://m.blog.naver.com/459745/220711472799

진입 방법 이동 경로를 상세하게 안내해 주셨습니다.

 

청주시 것대산은 청주시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야경 명소!

 

상당산성보다 좋나요? 궁금하네요? ㅎ

 

것대산 정상에 오르면 청원과 통합되기 전의 청주시 대부분과

현재의 청원구 오창까지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합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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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대산의 이름은 『조선지도』에는 '거질대령(巨叱大岺)'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대동여지도에는 거대산(巨大山)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거차대(居次大)',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후 지리지에는 '거질대산(巨叱大山)',(8)

지금은 것대산, 거질대산, 상령산'(上嶺山)등으로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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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출처 < 제가 막 섞었어요! 원작자도 구분 못 함. ㅡㅡ.

 

(1) 충청북도의 문화재자료 - 위키백과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봉수(烽燧)

(3) 전국의 산에 봉수대가 몇 개나 될까?

(4)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5) 청주 야경을 한눈에 조망하는 것대산 활공장

(6)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청주 것대산 봉수

(7) 2009년 것대산 봉수대 복원 완료

(8) 충북 지명산책 것대산

(9) 다대포 아미산 응봉봉수대
(10) 응봉 봉수대
(11) 군사교통과 통신
(12) 전국에서 올라오는 봉수가 모이는 곳, 경봉수(남산봉수)

(13) 봉화

(14) 우리나라 전국에 존재하는 산의 수는 몇 개나 될까?
       충북에 330개, 전국은 4,440개

(15) 조선시대 내지봉수에 관한 연구

(16) 조선시대 봉수대의 구조와 조사방법

(17) 디지털천안문화대전 > 봉수

(18) 봉수, 조상들의 통신 네트워크 | 과학문화포털 사이언스올

(19) 것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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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문화재청 | 이미지 라이선스 : 공공누리 일반증서

https://www.kogl.or.kr/info/licenseType1.do

 

이제 조금 알겠네요. ㅡㅡ. 5번 째 수정 중. 끄르륵.

Deep Link가 이상하게 연결된 현상이 있어 

집구석 서버에도 할 수 없이 담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빠른 대처를 할 수 있으니까요!

 

최종수정 : 2021.11.12. 15:30

 

One Day, Hope This Helps!